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평도 포격전 (문단 편집) == 후속 대응 == 군 당국에서는 [[전사#s-2]]한 두 장병 유가족들에게 브리핑을 하는 과정에서 사망시각, 장소, 최초 목격자 등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바람에 유가족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장례절차 논의를 거부하였다. 이 과정에서 '북한에 의해 사망한 것인지, 아군의 포탄에 당한 것인지 밝히라,[* 당시 연평도 남쪽에서 포 사격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[[유탄]] 의심이 제기되던 상황이었다.] 이러니까 [[천안함 피격 사건]]이 미궁인 것이다'라고 외치는 등 격한 감정을 쏟아내었다. [[http://www.yonhapnews.co.kr/politics/2010/11/24/0521000000AKR20101124118700061.HTML|#]] 유가족의 발언이 한때 논란이 되긴 했으나 일단 명확히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군 당국에 대한 원망[* 사태 초반이었기에 [[군사기밀]]로 분류되어 함부로 밝히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]에서의 발언이기에 과대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. 다행히 당국에서 상세 브리핑을 하면서 장례절차에 합의했다고 한다. 27일 영결식이 치러졌다.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03&aid=0003554909|#]] 또 중상자 후송에 [[헬리콥터]]가 아닌 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작전상황이라 헬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. [[http://www.yonhapnews.co.kr/bulletin/2010/11/24/0200000000AKR20101124203000061.HTML?did=1179m|#]][* [[연평도]]를 포함한 [[서해 5도]]는 [[북한군]]의 [[대공 미사일]] 사거리 내에 있다. 이 문제 때문에 서해 5도로 어떤 형식이든 항공기가 들어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편이다. 평상시에는 육지의 병원으로 즉각 후송해야 할 환자가 있을 경우 헬기가 뜨긴 한다.] [[천안함 피격 사건]]이나 [[제1연평해전]] 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. [[대한민국 정부]]는 [[북한]]에 대한 모든 지원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으며 민간단체들을 통한 지원도 끊을 것이라고 밝혔다. 이에 따라 [[수해]]지역에 지원할 예정이였던 쌀 등 각종 물자들은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. 연평도 포격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북한 [[조국평화통일위원회]]의 관영 인터넷 웹사이트인 [[우리민족끼리]]는 이 판국에 "[[금강산 관광]] 재개를 가로막기 위한 고의적인 책동을 통해서[[남북관계|북남관계]] 개선에 관심이 있다면 부당한 구실에 매달리지 말고 관광재개를 위한 회담탁에 나와야 한다. [[이뭐병|우리는 악화된 북남관계를 풀고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해 대화와 관계 개선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]]"는 등으로 [[금강산 관광]] 재개 관련 회담이라는 [[개드립]]을 시전했다. [[http://news.joinsmsn.com/article/aid/2010/11/25/4377587.html?cloc=olink|#]] [[우리민족끼리 테러 사건|그러나 얼마 안 돼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.]] [[북한]]의 도발에 따른 대응조치의 첫 번째로 서해 한미연합훈련을 28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. 여기에는 핵항모인 조지 워싱턴이 참여했다. 공식적으로는 계획된 훈련을 날짜만 확정했을 뿐이라지만. 또한 연합위기관리팀을 가동하고 상황분석과 연합대응 방안 마련에 나섰다. 연합위기관리팀에서는 정규전 확산가능성과 [[데프콘#s-1]] 격상 여부를 평가하게 된다. 다만 문제는 조지 워싱턴호 파견에 대해 [[중국]] 측이 '한반도 평화에 방해만 될 뿐이며, 외교적 노력과 대화로 풀어야 한다'며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.[* 중국은 근대에 들어 서해에서 진짜 '''쓴맛'''을 많이 보았다. 90여 회의 크고 작은 사건이 서해에서 있었다고 하니 당연히 중국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것이다. 게다가 사건이 있었던 때는 [[아시안 게임]]이 한창 진행될 때. 만약 서해에 [[항공모함]]이 오면 일시적으로 '''[[대만]] - [[미국]] - [[대한민국]]'''이라는 라인이 만들어진다. 게다가 미국 [[항모전단]] 서해 파견은 자동으로 '중국 공격 훈련'도 겸할 수 있다. 중국의 입장에서 반기고 싶을까?] 일단 미국은 한미연합훈련 일정을 북한과 중국 측에 통보한 상태이며 이 두 나라의 반응에 따라 한반도가 한동안 잠잠해질 것인지, 아니면 정말 확전 내지는 전면전이 될지 판가름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. 대응조치에 대해선 사실상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는 상황이었다. * '''군사적 맞대응 옵션''' * 사실 북한이 이에 대해 전면전으로 대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도 하고, 미국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. * '''[[해상봉쇄]] 혹은 모든 북한 출입 선박에 대한 검문검색''' * [[유엔]]의 승인과 국제연합군 결성이 필요하다. * '''[[유엔 안전보장이사회]] 회부''' * 시간이 오래 걸려서 실효성이 크지 않으며, 중국과 러시아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예상되기에 오히려 [[NLL]]이 분쟁수역화되는 등 북한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. * '''대북 금융 제재''' * 이미 북한은 최고 수준으로 금융 제재를 당하고 있다.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는 이미 다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뭐 추가할 조치가 없다. 이에 양자조치에 초점을 맞추고 한미공조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이 경우도 북한이 예전부터 반복된 이런 류의 대응에 단련된지라 실효성이 적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. 11월 25일부터 [[연평도]]를 포함한 [[서해 5도]]의 여객선 운항이 재개되었다. 이 사건으로 [[김태영(군인)|김태영]] [[대한민국 국방부장관|국방부장관]]의 사의가 수용되어 [[김관진]] 전 [[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|합참의장]]이 새로 국방부장관에 내정되었다.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경질된 데에는 사태가 발발하고 [[이명박]]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이 한 발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이야기했다는 [[청와대]] 측근들의 불만 및 [[국지도발]] 시 작권권한과 관련해 [[대한민국 국군|우리군]]의 행동제약을 주장해서 이명박 대통령을 화나게 했다는 것이 작용했다고 한다. 일단은 확전 방지에 초점을 맞추려는지 심리전 계획은 취소시켰다.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0&oid=020&aid=0002187045|남북관계 악화 우려, 심리전 재개 포기]] 포격도발에 대한 대응으로서 발생한 사건은 아니지만 11월 28일 파주의 [[대한민국 육군|육군]] [[제1보병사단|1사단]] 모 포병부대에서 훈련 중 잘못 발사된 155㎜ 견인포 포탄 1발이 비무장지대에 떨어지는 오발 사건이 있었다. [[http://www.hani.co.kr/arti/politics/defense/451036.html|#]] 비록 해당 포탄은 군사분계선 수백미터 이남에 낙탄했고 사건 발생 직후 대한민국 국군이 오발사고임을 북측에 통보하자 북한에서는 반응이 없이 종결되었으나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국군의 선제포격으로도 인식되어 군사적 충돌로 번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라 당시 전방 부대의 군인들은 사건 직후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부대의 포진지를 점령하거나 배수로로 뛰어들어가는 등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. 그리고 29일 [[연평도]]에 [[K-9 자주곡사포]] 6문과 [[K-136 다연장로켓]]을 추가로 배치했다. [[http://media.daum.net/politics/north/view.html?cateid=1068&newsid=20101129174315018&p=yonhap|#]] 뒤늦게 확인된 바로, [[대한민국 국군]]은 육·해·공군을 총동원한 보복공격을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. 실제로 [[로버트 게이츠]] 전 [[국방장관#s-3.3|미국 국방장관]]이 2014년 1월 14일 출간한 회고록에 따르면 [[대한민국 정부]]의 원래 보복계획은 공중공격과 포격이 포함된 공격적인 수준의 대응이었고 이에 [[미국]]은 보복이 서해에서의 국지적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한·미 간 협의 끝에 연평부대의 포병대가 북한 해안포대에 보복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수준을 낮췄다고 한다. 미국이 한국의 보복계획을 축소시킨 배경은 미국 내부 사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. 2007년 말부터 시작된 [[대침체]]의 여파로 미국 경제는 박살나고 있었으며 [[이라크 전쟁]]과 [[미국-아프가니스탄 전쟁]]으로 인해 [[미군]]의 피해가 커지면서 추가적인 대외전쟁에 개입하기엔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. 실제로 2011년 [[카다피]]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군과 [[나토군]]은 [[오디세이 새벽 작전]]으로 리비아 시민군을 항공전력으로만 지원했을 뿐 전면적인 지상군 개입은 하지 않았으며 [[시리아 내전]] 기간 동안 시리아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[[바샤르 알 아사드]] 정권을 두고도 개입하지 못했다.[* 그 이전인 1976년에 터진 [[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]] 당시에도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의 도끼 도발에 죽은 초대형 사건임에도 미국은 무력시위로 위협만 했을 뿐 [[베트남 전쟁]]과 [[석유 파동]]의 여파로 북한을 칠 엄두는 못냈다. 오히려 [[한국군]]이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을 하고 싶어 안달났을 정도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